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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페이지 정보

짐보 (108.♡.♡.226)2018-09-20 09:59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라오디게아 교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요한계시록 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주님께 책망을 받았다.
부요하여 책망을 받았는가?
아니다.
부가 믿음의 척도도 아니며
더구나 부가 없음이 더욱이 저주도 아니다.
부는 자신들을 신뢰하는 유혹이 되기에
자신들의 부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증거로 여긴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가 자신들의 믿음의 열매라고 여겼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 했다.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족함이 없는 부자 교회라 했음은
부가 자신들의 믿음의 척도가 되었기에
이미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이라,
공동체의 가치관이 영원을 추구하여 소망을 갖기에
현세의 삶의 의로 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인 공동체라
사랑은 부족함을 채워주는 공평이라
물질을 나눔은 진리를 가진 자들의 믿음의 행위라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누어 줄 수 없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나눔을 오직 물질에 예속(隷屬)시키면 복음의 의에 벗어나고
물질의 나눔이 없음도 외식이라
교회는 세상을 이끄는 가치관의 공동체라
교회의 가치관이 물질에 치우쳐 정의롭지 못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주님은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교회라 했고
이 주님의 말씀을 관련하여
‘보물을 하늘에 쌍아 두라’ 는 소제목의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왜 주님께서 오늘날과 같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였는지 알 수 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1-24]
주님은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는 말씀이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물질관을 말씀하시며 동시에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는 가치관의 말씀으로
땅에 있는 물질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고 잠시지만
하늘에 보물을 쌍아 두는 일은 믿음의 영역이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세상의 물질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는
무엇이 우선인 결단의 행위가 믿음이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보물이 필요하시지 않으신 분이시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일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 :33]
주님의 말씀은 물질관을 뛰어넘는 믿음의 인생관
항상 하나님의 의(his righteousness)가 먼저인 순서가
하나님 나라의 의라
그러하면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말씀으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처럼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인격의 중심에
네 가치관이 너의 마음으로, 너의 행동의 방향으로, 행위로 이루어지는 믿음이라
만약에 믿음이 있다면서 명예로 구하면
그 욕심으로 욕망의 포로가 될 것이며
보물(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보물의 노예가 될 것이며
즐거움을 삼는다면 방탕에 빠질 것이라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는 언제나 선한 일이라
먼저라는 가치관이 믿음이라
그 가치관의 믿음이 기쁨이라 소망이 되어 평안을 이루기에
주님은 눈을 몸의 등불이라 하셨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람의 마음이라
눈은 단지 상징적인 육체의 의미만이 아니라
눈이 보는 바는 마음이 보는 바라
눈이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아 세상의 것에 심취하면
그 마음은 욕심의 행위로 이어져 욕망에 사로잡히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의에 초점을 맞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의 복음이 보여
그 마음은 이미 성령님과 함께한 마음이라 신령한 것을 보고
선한 마음으로 가득 차 선한 행위로 열매를 맺는
믿음이 행위와 함께 한 자라
온 몸이 밝을 것이라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나 마음의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운
자신의 육체의 욕구로 세상을 바라보아 온 몸이 어두워
믿음의 행위라 면서
세상의 어둠에 머문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은 빛이 어두우면,
마음의 등불이 어두우면,
진리가 보이지 않아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여,
어둠으로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두운 세상을 바라본다면 온 몸의 상태는 욕망을 바라보아
마음의 눈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바라보지 못해 분별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한시 적인 인생의 삶으로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종당에 치명적인 허무와 절망의 상태로 향하기에
하나님의 의와 멀어지고 불신자와 같은 가치관이 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면한다면,
신자라 하면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가기에
네 몸이냐, 교회라는 공동체냐,
외식적인 모임인 교회냐, 주님을 닮으려는 신앙의 공동체냐,
어둠이냐, 빛이냐, 는 선택이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The light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thine eye be single,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눈은 몸의 빛이라
빛이신 하나님의 진리는 혼선이 없고 굴절도 없듯이
성한 눈을 가진 자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
그래서 성령님이 교회를 향한 말씀을 듣는 자
그런 자들은 진리를 진리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참된 지혜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주님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이 행위가 된 의가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것이 되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선한 물질관과 더하여
그리스도 주님을 닮으려는 의가 보물이 되어 성한 눈이 되기에,
“네 눈이 성하면
if therefore thine eye be single”
이 말씀은 주님의 비유인 들보와 연관되어
성한 눈은 들보를 뺀 눈이 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3-5]
그러기에 성한 눈은 외식인 들보를 뺀 행위라
그 외식의 행위가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행위이며
외식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위선이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어느 한 쪽의 선택을 주님은 간절히 바라셨기에
그 선택을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는 말씀이며
오늘날도 이와 마찬 가지라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심이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주님은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한복음 8:53]

오늘날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에게 물음과 같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이 말씀과 보물의 말씀은 같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네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네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네 만족에 취하여
네 도취에 취하여, 네 의에 취하여
네가 주여, 주여 흥겨운 음성을 높이고 영광을 돌린다고 버릇처럼 말하지만
너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어 벌거벗을 것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수치라
너의 수치가 그리스도 주님의 수치라
높아지려는 명예와 소유하겠다는 욕망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너는, 네가 누구기에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네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물음의 말씀은,
외식을 일삼으며 가증하게 하나님의 경외한다는 유대인에게 물으셨고
이를 닮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물으셨고
그리고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아 외식이 일상이 되었으면서
가증하게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교회를 향하여 물으신다.
그러시기에 귀 있는 자,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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