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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페이지 정보

짐보 (108.♡.♡.226)2018-04-06 10:28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하늘나라는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의 주장처럼 죽어야 가는 나라가 아니기에
예수님은 참으로(I tell you of a truth) 진리로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But I tell you of a truth, there be some standing here,
which shall not taste of death, till they see the kingdom of God.
누가복음 9:27]
누가의 이 증언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And he said unto them, Verily I say unto you,
That there be some of them that stand here,
which shall not taste of death,
till they have seen the kingdom of God come with power. 마가복음 9:1]

죽기 전에(not taste of death), 죽음을 경험하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there be some standing here) 있기에
이를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 같이
마태복음 16:28에 같은 뜻으로 기록되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Verily I say unto you, There be some standing here,
which shall not taste of death,
ti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
그 당시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죽기 전에(not taste of death)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there be some standing here)은
왕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자들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자들이 있다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대에 임하는지 물었을 때의
대답의 말씀 누가복음 17:21과 같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천국은 너희 안에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하시며
똑 같이 다시 말씀하셨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Whosoever shall seek to save his life shall lose it;
and whosoever shall lose his life shall preserve it. :33]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자기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인 한 자로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려서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정의를 베푸는 자,
자기 목숨을 그리스도의 의를 위하여 잃는 자,
무릇 죽더라도 사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기에
그런 자는 자기 십자가를 메어 일시적인 고난을 받을 지라도
그는, 그런 자들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죽기 전에(not taste of death) 볼 자들이라
하나님 나라를 이룰 자들이라.

그럼 하나님 나라를 본 자들은 누구인가.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누가복음 9:28-32]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났다.
마가복음 9:3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는 하나님 나라가 올 때
그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될 그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다.
흔히 표현하는 이 변화 산의 ‘변화’를 뜻하는 헬라어는 ‘메타몰포오라’ 로
이 변화를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And be not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y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at ye may prove what is that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will of God. 로마서 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상을 따라 세상과 같이 동조하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
마음을 새롭게, 그리스도를 닮은 새 마음으로 변화하여
천국복음을 소유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용납하실 삶으로 변화하여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
이 생활이 영적 예배라
일상의 생활이 예배라
이를 증명하는 삶이 하나님의 자녀의 도리라
이 변화가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의로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나 되는 이 변화는
아직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이름으로 변화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변화’로
거룩한 나라에 속하기에
거룩하게 불림을 받는 성도(聖徒)라 거룩하게 칭하고
거룩하게 성도라 부른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12-18에 다시 이 ‘변화’를 말했다.
[우리가 이같이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한 후에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
증거의 두 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지만 그는 이 사실을 몰랐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의 영광 때문에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기에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지만,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할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애굽기 34:33-35]

모세의 얼굴의 영광은 잠시의 영광이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가 가린 수건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고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당시에도
그들은 구원의 수단으로 여전히 율법에 집착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율법도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짐 같이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기에, 성령님과 함께 하면 자유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우리는 죄를 자백하고 버림으로서 수건을 벗은 얼굴로
수건 없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라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거울을 보는 것 같이, 거울은 주님의 말씀이라
얼굴과 얼굴로서 대면할 수 없지만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보기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 할 때,
그리스도를 닮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우리는 주님과 같은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 하여
이 변화로 성도(saint)되어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even as by the Spirit of the Lord”
성령님으로 말미암음 이라.
그래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이는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른 한 단계의 영광으로 이동,
‘변화’를 가리키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까지의 변화로
그러나 즉각적인 변화가 아니라
율법과 같이 점점 없어져 가는 영광과 다르게
점점 증가하는 영광이라 이 과정에 능력의 근원은 성령님이시라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음이라 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
모세와 엘리야는 선지자로 특별하게 죽어서 그 시신을 찾을 수 없던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과 함께 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에 함께 하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
이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별세’ 라 죽으심으로 표현하였지만
KJV 는 ‘should accomplish at Jerusalem’ 으로 성취하심으로 표현했고
어는 성경학자들은 한 장소에서 한 장소로 ‘이동’ 으로 주장하지만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장차 이루어질 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미래에 대한 대화를 했기에
이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예정하신 일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이었기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일을 대하여
성령님께서 오시기 전 까지 침묵을 했다.

그 후 이 변화 산의 사건을 베드로는 둘째 서신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후서 1:14-18]
이미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언제 죽게 되실 것과 어떠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이제는 자기의 죽음이 가까워 졌음을 알았다.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장막은 여행자들이 잠시 거하는 처소인 것처럼
이제 육체는 세상에서 믿음의 순례 길을 다 마칠 때까지 거하는 장소라
다시 육체가 살리심을 받아 변화할 때 까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변화 산의 기록을 남겨 이 기록을 통해 성도들이 진리를 알고 기억하기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Yea, I think it meet, as long as I am in this tabernacle,
to stir you up by putting you in remembrance; :13]
내가 육체로 이 세상에서 함께 있을 때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as long as I am in this tabernacle”
‘tabernacle, 은 천막, 장막을 뜻하나
여기에서는 성막(聖幕)으로 이동식 성전 같이
육체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의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의를
세상의 삶이 예배가 된 베드로는
육체를 이렇게 표현하였으리라.
그래서 신약의 레위기라는 히브리서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But Christ being come an high priest of good things to come, by a greater and more perfect tabernacle, not made with hands,
that is to say, not of this building; 히브리서 9:11]

베드로는 이 변화 산의 사건,
하나님 나라의 사건을 간절히 전하기 원하였기에
이렇게 다시 말하며 다시 강조하였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Moreover I will endeavour that ye may be able after my decease to have these things always in remembrance.”
베드로는 자신의 육체가 장막을 벗어나더라도
자신이 보고 격은 주님의 능력으로 강림하신 위엄과 존귀와 영광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애써 기록하여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증거를 기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와 같이
성도가 있는 곳이 거룩한 산과 같이 거룩히 변화하게 하여야 할 사명,
그 사명이 복음의 의 인데
그러나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은
이스라엘의 한 구역을 한 건물을 ‘성지’ 라 하고
이 관광을 ‘성지순례’ 라 하여 종교적인 의무와 신앙을 바꾼 자들이라
예배를 위한 건물을 아직도 ‘성전’ 이라 하고
건물 안의 종교 의식을 예배로만 간주(看做)하고 가르쳐
한 생명, 생명을 등한시 하여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다.
[화가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마태복음 23:13]
천국의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그런 외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불법자의 동류로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았고
똑 같이 오늘날 예수님을 파는 종교행위에 온 정신을 다해 열중하는
종교적인 행위에 몰두(沒頭)하는 자들이
정의커녕 정직한지 바라보라.
화가 있을 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화가 있을 진저 외식하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여.
말들이 바위에서 달리고
소가 거기서 밭 간다는 허황된 달콤한 감언이설로
현실을 떠난 몽상의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자들이여.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아모스 6:12]
정의를 쓸개로 바꾸고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꾼 자들이여
외식하는 자들이여
화가 있을 진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기커녕
어수선하고 떠들썩하여 분란(紛亂)을 일으키고
찢어져 갈라지는 분열(分裂)로
하나 되는 복음의 망각하고 스스로 어그러진 길로 가는 자들이여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외식하는 자들이여
순종을 맹종으로 맹신으로 바꾼 자들이여.

그래서 이 시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을 어느 성경학자는 잘못된 성경의 기록으로 본다.
성경 원문을 잘못 해석하여 에세네파 예식에 대한 규례들 중에
천 명을 거느리는 천 부장 다섯을 먹인 것을 오천 명을 먹였다는 잘못된
번역은 원래 복음서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었지만 그 뒤 전혀 다른 언어 체제인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잘못 기록된 모임과 숫자로 본다.
그럴까?

어느 이들은 아이가 갖고 있는 보리떡과 물고기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기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다 주장한다.
그러면 아이의 자원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는 주장인가.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말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9]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기적을 예수님의 능력의 사건으로 보아
사람도 살리고 죄도 사하고 무한한 능력의 예수님으로 보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어
그 능력을 받아 이적과 기사의 기적을 자신의 삶에 보기를 원하고
그 능력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보고 믿고 체험하라고 어리석은 자들을 유혹하고
이런 자들을 따라 능력과 기적을 보기 위하여
언제나 자신의 신실한 믿음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고
불치병을 치료 한다는 부흥회에 육체의 치료와 정신 건강을 위하여
신유의 집회에 참석하지만
그들은 늘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에 듣고 보고 믿어
체험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의 불을 받으라고 호통을 치기에
어리석은 자들은 그런가 하여 은사를 받겠다고 은사주의에 빠져
자신과 자신만의 안위와 안락과 복을 위하기에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믿음이라는 위선에 갇혀
자신이 도취한 자신만의 근본주의의 덫에 걸려
자신이 보고 체감한 믿음의 역사라 우기는 주장의 올무에 걸려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의 초보적인 믿음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신앙의 근본주의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치유도 하시고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함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성령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주님의 통하여 그리스도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성경으로 인도하셔서 말씀으로 깨어지기를 늘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4]

믿음은
선택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장성하면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 세상의 삶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삶이고 생활이라
정의를 베푸신 그리스도를 본받은 가치관의 삶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라 교통이며 교제라
그런 선택받은 자들이 모임의 공동체가 교회이기에
교회가 서로 교통하지 못한다면 교회가 아니라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지 못하기에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얻지
못하여 시기와 분란 분열로 사라지기에 언약의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새 언약(the new testament)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인류를 사랑하심으로 죄에 헤어 나오지 못하여 상한 갈대처럼
신음하고 꺼져가는 등불처럼 죄에 빠져 고통을 당하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엾게 여겨 긍휼하심으로 자비하심으로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하시려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의로 오시어 그로 말미암아 성령님께서 이룬 교통의 공동체라,
성령님의 교통이 없어 서로 교통 하지 못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피와 살을 나누는 교제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교제가 사라진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기에
교회의 건물에 십자를 장식하고
거룩한 척 성전이라 부르고
‘주여 주여’ 소리를 높여 기도하고 찬양하더라도
아무리 십일조 건축헌금 감사헌금 등을 많이 내놓더라도
하나님의 의인 정의가 사라진
그리스도 주께서 베푼 정의가 사라진 공동체는
성령님께서 공급하는 힘을 잃어버려
종교적인 의식만 남은 교회는 성경의 교회가 아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언약은 소망이며
이미 소망을 갖은 평안이기에
이는 이 세상에서 전하고 행하는 복음에 녹아있는 정의이기에,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처럼
복음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 지를 한말을 자꾸 되풀이 하는
중언부언(重言復言)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정의로워야 할지
고난이 아니라 고민마저 없는 자들이 믿어 천국 간다는
맹신과 광신의 시대라
수시로 성경을 읽고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묵상하여
고심해야 하는데 단편적이고 편향적인 설교로 은혜 받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여 직분을 받고 안수를 받으면 천국행 표를 따놓았다는 괴설은 도대체 어떻게 복음을 이해하였는지,
이 세상은 오르지 믿어 천국에 가기 위한 삶이 아니라
이 세상, 이 땅을 기업으로 받아 하나님 나라를 본 받은 기업이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믿어 천국의 소망을 가졌다는 자들이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자들로 넘치기에
자녀가 좋은 성적으로 받아 유명한 대학을 가면 더 충성하겠다고 하여
자녀의 입학시험 때가 되면 철야예배 새벽예배에 더하여
특별히 자녀입학을 위한 예배를 갖고
돈을 벌면 더 많은 헌금을 하겠다고 하고
그러면 하나님을 일을 더 하겠다는 서원(誓願)이 예배가 되어
하나님과 거래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긴다는 자들이며
이를 부추기는 자들은 서원을 구실로 맹종의 헌신을 강요한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 보다 정의롭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보다 매너가 없고 배려가 없어 예의를 실종한
이런 마음의 행위가 그리스도 주님에 대한 외식임을 왜 모를까.

마음의 준비(all readiness of mind)없이
준비된 마음이 없는 간절함은
믿음의 분별력에서 비롯된 간절함이 아니라
믿음에서 비롯된 맹세도 아니며 더구나 소망이 아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These were more noble than those in Thessalonica,
in that they received the word with all readiness of mind,
and searched the scriptures daily, whether those things were so.
사도행전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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