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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페이지 정보

짐보 (96.♡.♡.163)2017-09-21 11:04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어둠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둠이 깊을수록 창에 비친 내 얼굴이 선명해지고
그 얼굴은 세월 속에 잊어버린 아버지의 얼굴로 다가와
언제나 말없이 바라보시며 자식을 아끼는 마음을 속에 담고 삭이시는
아버지의 얼굴 같아 놀랄 적이 있고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고 일상의 생활에 안주하려는 분주함에
잊었던 지난날인데
오늘도 뜬금없이 아버지의 말씀이 들린다.
‘학교 안가니?’
(언제 적 인데...)
‘교회는?’
국민 학교라 불리던 그때는 교회가기가 싫었다.
친구를 만나 좋았지만 서로 다 아는 동네 친구들인데 말도 못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눌려 두 시간 정도를 앉아 있으면 따분하고
몸이 쑤시다 못해 근질거려 고문이었고
더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는 고역이었다.
특히 ‘양’ ‘어린 양’ ‘양 떼’ 양이란 말이 이해 할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듣기 싫었고 듣기 싫은 건 아직도 마찬가지다.
하긴 지금도 교인을 양으로 부르면서 본인이 목자라는 목사도
부지기수(不知其數)로 많고 스스로 직분을 높이기 민망한지
목사는 목자의 양을 지키는 개라 하는 사람들도 있어
개가 된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비유라 해도 누구의 양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당시 부활절과 성탄절은 선물을 받았는데 대부분 공책 받침 이었다.
공책(노트)에 글을 쓰면 연필심이 뾰족하여 종이가 찢어지고
연필심의 재질이 떨어져서 글이 흐려지기에 침을 발라 쓰기도 했지만
글을 쓰는 종이 밑에 플라스틱의 받침을 받치면 그런 염려를 하지 않아
편리했지만 플라스틱 받침의 그림은 늘 양떼를 모우 시는 예수님의
품 안에는 어린 양을 안고 계신 모습이었고
공책 밑에 받침으로 쓰다 장을 넘기면서 다시 받침을 옮기면
또 보이는 양의 모습이 싫어서 플라스틱 받침의 한 겹의 코팅을 뜯어내어
그림을 지으려 했을 때 그때 비로소 받침에 그려진 구름을 보았다.
어린 양을 안으신 예수님 머리 뒤편으로 작게 그려진 뭉게구름을 보았고
그 구름이 내게는 잊히지 않는 꿈이 될 줄 몰랐다.

어린 아이 때부터 우울한 마음은 이미 습성이 되어
세상은 우울하게 보였고
사춘기 때는 병같이 도져 앓고 방황을 했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모순투성이 여서
하나님은 내게 꿈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을 주시는 분으로 인식되어
신앙의 언저리는 세상의 끝이어서
동 서 남 북 어디로 갈지 서성이다가
공허의 끝에서 만난 허무의 실상이 믿음이 될 줄 몰랄지만
믿음의 언저리에서 내 생의 끝을 바라보았을 때
내가 죽어야 네가 사는 목숨을 건 한 알의 밀알 같이
내가 죽어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이 삶의 가치로 여겨
눈물로 애원하듯 기도하다 감사함이 가슴 가득하여
내 영혼이 찬양할 때 잊혔던 공책받침의 뭉게구름이 떠올랐고
가슴은 뭉게구름처럼 둥실 둥실 떠다니다 뭉게구름을 커지고
커져서 가슴에 차 내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여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꿈이 되면
그 꿈이 소망이라
그리스도 예수를 간직한 이 사랑을 품고
가슴으로 가슴을 풀어야 할 이 사랑이라
이제 나는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 주어야 또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랑의 원리,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일상에 근본이 되는 진리임을,
그런 사랑으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였듯이
그 음성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듯이
그 같은 사랑으로 나를 내 주어야 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목숨 인 소중한 사랑
그 같은 사랑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건만
돌아보면 그 사랑에 겨워
세월의 마디마디 후회라는 굳은살이 박이고
세월의 마디가 매듭이 된 옹이가 되어
역겹게 변질된 세월의 매듭처럼
변절된 믿음이라는 신앙
그 날의 변절과 오늘날의 변절
그 날의 고귀한 그리스도의 사랑(charity)과 오늘 날의 사랑...
어리석음이여
어리석은 자여.

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듯이
내가 아들에게 말하였다.
‘교회는?’

한국을 떠나오면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하였다.
이미 예배당이 성전으로 둔갑하여 건물 짓기에 혈안하면서
부흥이란 이름으로 떠들어 대던 수많은 엉터리 부흥사들을 따라
은사에 목매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전염병이 퍼지듯 퍼졌고
돈 내고 복 받기 투기 현상은 이제 기도원 짓기 유행을 따라
성전인지 기도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란한 예배
통성인지 절규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
찬양인지 통곡인지 알다 모를 수 없는 찬송...
미쳤다 단정했다.
이제 누가 이 소란을 멈출 수 있을까.
누가 이 광란의 미혹에 빠진 자들을 건질 수 있을까.

외로웠다.
모진 바람 부는 날
홀로 언덕위에 선 것처럼 외로운 나날
가당찮은 외로움이 의로움이 된 날
몸부림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납득(納得)된 날
또 꿈을 꾸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소망으로 어울려진 하나님 나라의 꿈
그 날의 꿈과 오늘날의 꿈...
절개(節槪)를 지키지 못하는 믿음과
신앙의 지조(志操)를 잃은 변절...

복음의 어그러진 길,
진리가 왜곡된 선동(煽動)의 길,
부흥을 빙자한 번영(繁榮)의 타락의 길은
화려한 교회가 더 화려해져 성전이 되어 감은
진정 화려한 만큼 탈선(脫線)하여 몰락(沒落)하는 줄 몰랐단 말인가.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그랬으며
스룹바벨 성전, 헤롯성전이 그랬기에
예수님은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거라 했으며
생명으로 생명을 건지기에
예수님이 성전이 되셨고
이 산이나 저 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는 하나님을 건물에 가두는
예배의 처소는 사라지고
오직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셨는데
하나님을 성전에만 계신 분으로 착각들 하였기에
교회가 성전이 되어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고도
육체와 영혼을 분리한 따로 국밥이 된 믿음이라는 거짓 신앙으로
믿음에서 행위를 분리시킨
외식된 종교화의 거대한 물결을 누가 막을 것인가...
하루하루의 삶에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진리가 생활이 기준이 되어
정의가 생활의 빛이 됨이 예배인 것을
예배를 거룩한 건물에 예속시킨
종교적인 의식은
바리새인들로 가톨릭으로 개신교로
어리석은 종교의 역사는 반복되어
뭐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물하는 교만은
오늘도 계속된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사도행전 7:46-50]

교회가 성전이라는
종교화 된 믿음이 권력의 수단으로 변절된 역사는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박해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임명된
부제로 그가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한 일은
교회사의 비극의 역사임은
타 종교를 접속시켜 예를 들며 태양신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Sunday’ 로
312년 ‘숭엄한 태양의 날(Dies Solis)’ 에 법전을 개정하여 국가 공휴일로
제정하였으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주일과 오순절 기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도 일로 규정하여 금하였고 성탄절, 부활절 등이 기념일로
공휴일로 정해지면서 가난한 사람이나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는 관습과
성탄절 나무를 세우거나 촛불을 밝히는 일들이 생겨났다.
더욱이 예수님의 말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는 말씀을
곡해하여 세속 권력자의 권력을 무조건 인정하고 복종하는 기틀과 전통은,
기독교 성직자의 직업의 탄생과 성직자의 부역, 군역과 세금이 면제되는,
종교 공인이전 신도들의 헌금에 의존하는 성직자가 권력이 되는 토대를
만들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시로 베드로가 묻힌 곳이라 믿어지는
무덤위에 성 베드로 성당을 326-333년에 지었고
후대의 사이비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대제(Constantinus Magna)라는
칭호를 붙여 그를 칭송한다.

가톨릭은
베드로의 무덤위에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Vaticana)를
1506년 4월18일에 짓기 시작하여 1626년에 완료하였고
베드로는 라티어의 ‘페트루스(Petrus)로 그리스어는 ‘페트로스(Petros)’ 로
바위, 반석이라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한 마태복음 16:18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여 베드로를 반석으로
베드로를 성인으로 우상화하였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하여 면죄부를 팔고 유아 세례 등을 행하였던
불의의 건물이 종교개혁의 한 원인이 되는데
오늘날의 사이비들은 가톨릭과 똑같이
자신의 교회를 베드로의 반석위에 세웠다고 주장한다.

이후 바티칸의 탄생은
교황청의 전권을 이양 받은 가스파리 추기경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수상은
1928년 11월 구체적인 조약을 만들고 1929년 2월11일 라테란 조약에
서명하면서 바티칸의 영토와 국민 및 주권을 지닌 독립국가로
화폐와 우표를 발행하고 국민을 다스리며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등
주권을 행하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하게 된다.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바티칸의 비밀문서를 공개하여
교황청과 히틀러가 결탁하여 유태인을 학살했다는 소문을 해명하기
위하였지만 사실로 드러나 공표하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하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곳곳의 전범재판에서는
교황청의 고위성직자들이 유대인을 학살하고 유태인 수용소를
운영하였으며 나치전범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 세상의 권력과 야합(野合)한 부류의 바리새인들의 역사는
오늘날 까지 이어졌다.

교회가 욕심이 잉태하여 권력을 탐하면 화려해지고
어쭙잖은 사조직을 형성하여 더 세분화 조직화 하여 제도화되면
직분을 구별이 차별화 계급화 한 당위(當爲)를 성경에서 찾아
구성하면서 조직의 안위와 유지에 힘을 쏟을수록 종교화 하여
종교적인 의식에 함몰하여 시대의 변절된 신앙이라는
이데 오르기로 무장하면
이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여
교회가 돈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여 부패해 져서 세속화가 되면
진리와 멀어져서 한 생명 생명보다 건물의 건축과 치장에 치중하고
사유화한 자신의 조직에 힘을 쏟아 종교의 사유화가 이루어지면
종교화된 껍데기만 남은 종교의식을
믿음이란 이름으로 사명감을 도취(陶醉)시키면
서로 도취하여 열심과 뜨거움은 있으나
진리를 왜곡한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진
정의가 사라진 사이비가 된다.

그 후 미국에 와서
한국에서 겪었던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똑 같은 소란의 재판을 보았고
그런 후에 교회의 예배 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사례비’ 라는 말과
교회의 일을 ‘봉사’ 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불의한 일에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 며 불의를 외면하고
불의한 일중에도 ‘이렇든 저렇든 복음이 전파되면 된다’ 는
복음의 외식은 흔한 일이 되었다.

보라.
예수님의 이 말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에
더하여 바울의 세상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자신의 욕구로 욕망의 도구로 합리화한 지난날 교회사와
오늘날의 사이비들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로마서 13:1]

화가 있을 외식하는 자들이여
화가 있을 위선자들이여
화가 있을 종교인들이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Woe unto the world because of offences!
for it must needs be that offences come;
but woe to that man by whom the offence cometh! 마태복음 18:7]
실족하게 하는 자들이여,
화가 있도다.

뒤돌아보라.
왜 성경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누구라고 성도 개인을 지목하지 않고
데살로니가 교회라 불렀을까?
교회는 무엇일까?
흔히 떠오르는 십자가가 세워진 건물,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인들 인가.
이 세상적인 세속적인
이 시대의 슬픈 운명 같은 기복의 비운(悲運)에 도취해도
행복하지 못한 불행(不幸)은
이 시대의 하나님의 정의와 그리스도의 도리와
성령의 신의에 어그러진 불의(不義)는
이 대답을 할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성경의 ‘교회’ 에 대하여 정의하는
올바른 신앙인을 만나기 어렵고 글과 설교를 감성에 호소하는 겉핥기라
진리의 갈증에 목마른 불의한 시대이다.

다시 보자.
‘성도’ 는 누구를 말함인가.
‘성도’ 라는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면 이 같은 물음에 대답이 된다.
‘성도(saints)’ 는 신자를 거룩하게 부르는 높임말이다.
부르심에 합당하여
부리심의 가치에 합당하여
(our God would count you worthy of this calling)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선물인 믿음으로 믿는 자가 되어
공동체(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이끎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이미 참여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룸에 참여하여
이로서 ‘성도’ 가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의(義)를 세상에서 실천하기에
형제자매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아
스스로 마귀의 자녀들로 드러낸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In this the children of God are manifest,
and the children of the devil:
whosoever doeth not righteousness is not of God,
neither he that loveth not his brother. 요한일서 3:10]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였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가치로 사는 공의로운 자라
형제자매를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아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낮아짐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이
힘의 근본이 되지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마귀에 이끌림을 당하는 자는
성령님의 능력을 소멸하여 자기 위안도 못되는 신앙에 취하여 종교화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자국을 가슴의 중심에 새기지 못함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의 중심에 인침을 받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세상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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