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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청교도 400년 - 플리머스 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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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20-02-2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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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청교도 400년: 순례자의 조상들

김정권 교수의 기독교 역사기행 

미국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 항을 찾아서

 

미국의 건국의 조상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청교도(puritan) 즉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일 것이다. 이들은 1620년에 메이플라워 호(May 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뉴잉글랜드로 온 영국의 '분리주의자들'(The Separatists)이라고 부르는 청교도의 한 급진적 분파이다. 이들이 미국에 도착한 지 올해가 400년이 되는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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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청교도 미국 도착 400주년 기념 emblem  © 김정권 

 

이들의 정신과 신앙에 터하여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형성되었으니 참 자랑스럽다. 미국에 청교도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식민지 개척을 위해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위해 건너간 사람들이고 소위 미국의 정신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은 이들 청교도이다.

 

나는 청교도 미국 이주 400년을 축하하면서 이들이 도착한 Plymouth 항과 그들의 초기의 정착촌 즉 오늘날로 치면 민속촌과 같은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imoth Plantation)을 소개하고 이들의 신앙과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을 소개하고자한다.

 

내가 플리머스를 방문한 날은 약간의 비가 내리고 안개가 많이 낀 날이다. 마치 영국의 항만에 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뿌연 바다와 캐이프 코드만(Cape Cod Bay)의 안개로 시야가 별로 좋지 않았다. 청교도가 첫 발을 디딘 곳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은 만의 자연 방파제가 된 반달형의 반도 북쪽 끝 부분에 있다. 여기서 청교도들은 다시 내륙 쪽의 플리머스 항으로 이동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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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ymouth Rock “1620” 영국에서 이주해온 청교도가 도착한 해  © 김정권

 

 이들이 첫 발을 디딘 바위에 그들이 도착한 년도를 음각(陰刻)해 두었다.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이며 이 바위에 그들이 도착한 “1620”을 음각한 것이다. 타원형의 이 바위는 본래의 위치에 배치되어 있어서 현재의 지표면 보다는 좀 낮은 곳에 놓여있고 이 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고대 희랍식인 주랑으로 된 비각(碑閣)이 그 위에 지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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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ymouth Rock “1620” 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碑閣) © 김정권

 

 

청교도는 누구인가?

 

이 황량하고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낯선 땅에 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영국에서 청교도(puritan) 운동은 17세기에 활발히 일어났다. 당시 정치 상황 때문에 영국의 헨리 8세(Henry VIII; 1509-1547)는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를 세우지만 그 개혁은 반쪽의 개혁일 수밖에 없었다. 교리나 교회조직을 거의 구교의 것을 답습했으니 큰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1533-1603)이 1603년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제임스 1세(James I; 1603-1625)가 등극하면서 국교회의 정화를 요구하는 청교도를 탄압하게 되었고 1607년 가을, 청교도 탄압이 심해져서 청교도가 투옥되고 일부는 처형당했다. 교회와 왕권을 통합해 강력한 왕정(王政)을 세우고자 한 제임스 1세는 교회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청교도들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청교도들이 갖게 되었고 분리주의자들의 예를 따라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한편 청교도 사이에서도 온건파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처음의 문제는 예배 의식과 교회 조직과 같은 문제였다. 분리주의 청교도는 주교의 권위나 위계적 교회 조직에 반대하고 초대교회와 같이 평등하고 수평적 교회를 요구했다. 청교도들은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자들로 왕과 교회의 권위를 배격하고 쾌락을 죄악시하는 사람들로 경건하고 더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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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희생과 구원역사: 복음의 진리를 알고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 김정권

 

이들은 모두 믿음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하고, 매일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며,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의해서만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데 생각을 같이한다. 성도는 오직 복음서에 의해서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생각도 공유했다. 그러나 온건파는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급진적 분리주의자들은 오로지 성경에 의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삶 전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어 반지성주의적 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온건파 청교도들에게도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런 청교도들의 신앙운동은 이미 유럽에서 12세기부터 일기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의 결실이라 해야겠다. 대륙에서 변질된 기독교를 바로 잡고자하여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고 지키기 위해 일어난 선각자들은 1. 피에르 왈도(Pierre Waldo, 1140~1217), 2.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3.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 4. 말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5. 기욤 파넬(Guillaume Farel, 1489∼1565), 6.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 7.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8. 존 녹스(John Knox, 1513?~1572), 9. 장 테오도르 드 베자(Jean Theodore de Beza, 1519~1605) 등 선구자가 있었다. 이들은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는데 5,000만 명이 순교했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떠난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미국식민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건너가게 된다. 이들을 스쿠르비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라고 하는데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런던 북부의 스쿠르비(Scrooby)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스쿠루비 분리주의자(Scrooby separatists)로 불리게 되었다.

 

  

메이플라워호로 미국을 향하는 순례자의 조상들

 

급진적 성향의 청교도들은 왕의 핍박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온건파 청교도들에게도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1608년 암스테르담(Amsterdam)으로 이주 했다가 다시 1609년 네덜란드의 레이던(Leiden, Netherlands)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곳에서도 문제가 생기고 안전하지 못하여 신대륙으로 이주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 신대륙 미국을 향해 떠나게 된다.

 

내가 플리머스 항을 방문 했을 때 메이플라워호 II는 2020년 400주년 기념을 위해 수리 차 코네티컷(Connecticut)에 배가 가있었다. 60여 년 간 매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기 때문에 배에 손상이 많았고 400주년 기념행사에 맞추어 수리하여 2019년 플리머스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아쉬움이 컸고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서 모형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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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ymouth 항에 정박해 있는 Mayflower II  © 김정권

 

메이플라워호는 180톤급의 배로 전장 106.5피트(32.46m), 폭 25.5피트(7.77m), 흘수선(吃水線, water line)이 13피트(3.96m)에 3개의 돛대를 갖춘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작은 범선이다. 이 작은 배에 102명이 승선했으니 무척 열악한 상황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지금 플리머스 항(港)에 전시되고 있는 메이플라워호 II(Mayflower II)는 베이커(Willam A. Baker)가 본래의 배를 철저히 고증하여 설계에 한 것을 론버그(Erik A. R. Ronnberg, Jr.)가 1955-1957년에 영국 블릭스함(Brixham)의 업함(Upham)조선소 에서 건조한 것이다. 이 배는 1957년 친선호로서 53일간 항해하여 대서양을 횡단했다.

 

영국에서 이들 순례자의 조상들은 우여곡절 끝에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북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진 허드슨 강 어구에 식민(植民)을 허락하는 특허장을 받아 1620년 9월16일 영국 남서단의 항구 플리머스(Plymouth)에서 메이플라워호로 출항했다. 이 배에 탄 사람은 모두 102명이었는데 레이던에서 온 순례자, 즉 ‘성도(Saints)’가 41명이었고 런던에서 모집한 ‘이방인(Strangers)’이 61명이었다. 메이플라워호로 대서양을 건넌 첫 이주자 중 숫자상으로 보면 순례자가 소수였으며 특히 영국의 스쿠루비(Scrooby) 분리주의자 중에는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8-1644, 부인 Mary Brewster) 부부와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88∼1657) 3명뿐이었다.

 

이들 청교도는 65일간의 고난의 항해를 하고 도착한 곳은 본래 목적지로 했던 허드슨 강(River Hudson)보다 훨씬 북쪽인 오늘날 매사추세츠 주(Massachusetts) 보스턴보다 남쪽으로 60km 정도 떨어져있는 플리머스 연안 케이프 코드만(Cape Cod Bay)의 프로빈스 타운(Provincetown)에 1620년 11월 21일에 도착해서 여기서 다시 육지 쪽으로 더 이동하여 12월 21일에 플리머스(Plymouth)항에 도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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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랜테이션 공방에서 만든 플리머스 원주민의 머리장식 headdress  © 뉴스파워

 

메이플라워호로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항에 도착한 이들은 이끌어간 걸출한 인물은 스크루비 출신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90∼1657)이다. 도착 후에도 브래드퍼드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청교도 사회가 유지되었다. 중요한 것은 정신 즉 믿음이 그들의 삶을 지배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정체성이 그들을 악조건에도 이기게 하였다.

 

브래드퍼드는 배에서 내리기 전에 메이플라워호 계약(Mayflower Compact; 1620년 11월 11일 서명)을 체결했는데 이것이 뒤에 미국 헌정에 기초가 되었다. 이 계약은 청교도 정신이 토대가 되었고 일종의 사회계약정신이 포괄되었다. 그래서 플리머스 식민지 통치의 기본이 되었다.

 

브레드퍼드는 이 계약이 구속력을 갖도록 전원이 계약하도록 하였다. 14세 이하의 아이들과 여자를 제외한 전원이다. 여기에 여자를 제외하였다는 약점이 있으나 노예까지도 서명하여 평등한 참여를 구현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 계약의 주된 목적은 배에서 내려 개인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고 청교도 공동체를 이어 나갈 구속력을 갖는데 있었다.

 

메이플라워 계약내용에는 청교도들의 분명한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건국의 정신이다. 그래서 이들을 순례자의 조상들(Pilgrim Fathers)이라 부르게 되었고 오늘의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메이플라워호 계약문을 다음에 소개하도록 한다.

 

메이플라워호 계약(Mayflower Compact)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대영제국, 불란서, 아일렌드 왕인 우리의 왕 제임스와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을 위하여, 우리나라와 왕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창설하고자 항해 할 것에 서명한다.

 

여기 본 문서로 엄숙하게 하나님과 각 개인 앞에서 상호 계약함으로 시민 정치 단체를 만들어 이것으로 공동의 질서와 안전을 촉진하고, 그 위에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령의 제정과 제도 조직을 구성한다. 평등성에 터한 법률, 법령, 조례, 헌법과 행정부를 필요할 때 구성한다.

 

이 모두는 식민지의 일반적 안전을 위한 간편하고 적합한 생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당연히 복종하고 순종 할 것을 계약한다.

 

증인으로, 경애하는 영국, 불란서, 아일랜드 제임스 왕 치세 18년, 스코트랜드 치세 54년, 주후 1620년 케이프 코드에서 11월 11일 우리의 이름으로 서명한다.

 

 

미국 케이프 코드 만에 도착한 순례자의 조상들

 

이들이 도착한 때는 겨울이고 땅도 얼고 바람은 강풍이고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주변의 원주민들(native)은 모두가 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청교도 순례자들이 항해하는 중 사망한 자는 1명이었으나, 악조건에서 오랜 시간 항해한데서 오는 신체의 허약함과 플리머스 상륙 후에 상황이 좋지 않아서 사망자가 많이 늘어났다. 브래드퍼드의 기록에 의하면 12월에 6명, 1621년 1월에 8명, 2월에 17명, 3월에 13명이 죽었고 1621년 4월에는 도착해서 플리머스 지사(governor)로 선출되었던 카버(John Carver) 마저 사망했다. 그 지사 자리에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88∼1657)를 선출했고 브래드퍼드는 30여 년간(1621-1657)이나 플리머스 지사로 일 하면서 식민지의 안정을 기하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도착하기 전에 원주민이 천연두로 많이 죽어서 상당히 그 수가 줄어있었고 청교도들을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해 주셨다.

 

이들 청교도들 즉 미국의 “순례자의 조상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이기도록 도울 사람을 보내주셨다. 이들 순례자 앞에 나타난 사람은 영국인 어부들로부터 영어를 배운 사람 사모셋(Samoset)이었다. 사모셋이 스콴토(Squanto)라는 원주민을 소개하게 되는데 이는 순례자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스콴토는 이 지방 출신으로 영국인의 포로가 되어 영국으로 잡혀가서 2년을 지내다 와서 사모셋 보다 영어가 능숙했다. 플리머스 청교도들이 이 지역사정을 알고 대처하게 도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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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리머스에 있는 순례자들의 박물관(Pilgrim Hall Museum)     © 김정권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도착해서 스콴토 덕분으로 그 지역의 부족 왐파노억(Wampanoag) 부족과 1621년 3월 22일에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이 계약은 메이플라워호에서 대표자로 선출되어 항해해왔고 도착해서도 플리머스 지사(Governor)로 선출된 카버(John Carver, 1584–1621)가 대표로 서명했다. 이 덕분에 순례자들은 도착한지 4개월 만에 그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첫 겨울에는 사망자가 많이 나왔지만 1621년에는 가을 수확을 할 수 있었고 추수 감사제를 지낼 수 있었다. 

 

왐파노억 부족과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서로 상해를 입히지 말 것,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상대에게 보내 처벌 하도록 할 것, 서로 물건을 훔치지 말 것, 훔친 물건에 대해서는 변상할 것, 상대방이 전쟁을 겪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서로 도울 것” 등이다.

 

이로서 두 부족은 서로 협력하게 되었고 순례자들은 농사와 고기 잡는 법을 배워서 생존에 도움을 받게 되었다.

 

  

미국 추수 감사절의 유래

 

순례자들은 스콴토를 비롯한 원주민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과 낚시 같은 실제적인 생활 기술을 배워서 이듬해 1621년 가을 제법 풍성한 가을걷이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를 올려 드리게 되었고 실질적인 도움을 준 원주민인 왐파노억(Wampanoag) 부족을 초대했다. 추장 마사소이트(Masssoit)는 90여명의 부족과 같이 참석하고 순례자들은 힘닿는 대로 융숭한 대접을 하여 선린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미국에 이주해 온 다른 지역의 이주자들이 대부분 원주민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는데 이들 플리머스 순례의 조상들만은 선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여기에는 좋은 조력자(사모셋, 스콴토 등)를 만나서 이기도하고 특히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88∼1657)의 탁월한 지도력과 사교적 역량 덕분이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을 공식 축일로 정한 것은 1817년 뉴욕 주가 처음이고, 이어 남북전쟁 중인 1863년 링컨 대통령이 11월의 넷째 목요일을 공식적인 추수감사절로 지정하여 시행한 것으로부터 전국적 감사제로 자리 잡았고 지금 미국에서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

 

 

미국 청교도들의 정착촌(Plimoth Plantation)

 

플리머스 정착촌은 우리나라로 치면 민속촌과 같은 곳이다. 순례자들이 집을 짓고 산 곳이며 더 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도운 왐파노억(Wampanoag) 부족의 추장 마사소이트(Masssoit)가 파견하여서 순례자들을 돕고 통역도 담당했던 호버목(Hobbamock)의 집과 조리장소를 여기에 같이 만들어서 그 선린관계와 도와주었던 일들을 같이 기억하게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도시 이름은 플리머스(Plymouth)인데 정착촌은 왜 Plimoth Plantation인가이다. 400년 전에는 철자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없었고 플리머스 지사인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가 P L I M O T H로 자주 썼던 모양이다. 이런 이유로 정착촌은 Plimoth로 표기하게 되었고 의미상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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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정착촌) 입구     © 김정권

 

내가 플리머스시에서 4.8km 정도 떨어져있는 정착촌을 방문하는 날은 쾌청해서 여행하기도 좋았고 시야도 무척 좋았다. 아침에 정착촌에 도착해서 안내소(information center)에서 자료를 구하고 영상자료도 보고 정착촌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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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머스 플랜테이션(정착촌) information center     © 김정권

 

밖으로 나가서 처음 만난 곳은 호버목(Hobbamock)의 집터이다. 호버목의 집터에는 짚풀과 나무껍질로 엮은 반타원형의 움막 한 동이 있고, 그 옆에 가건물과 같은 곳에 원주민이 불을 피워 음식을 장만하던 곳이 있었다. 순례자들의 집 보다는 규모도 크고 집을 짓는 양식이 다르다. 순례자의 집은 뱃집 모양인데 비해 원주민의 집은 반타원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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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버목(Hobbamock)의 집 외양(外樣)  © 김정권

 

다음 보아두어야할 사진은 호버목(Hobbamock) 집의 내부이다. 우리가 갔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여기 앉아서 호버목 역을 하는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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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버목(Hobbamock)의 집안 모습이다.  © 김정권

 

호버목(Hobbamock)의 집에서 순례자들과 회담도하고 농업이나 고기 잡는 방법 같은 것을 가르쳐 주기도 했을 것이다. 집 내부에는 불을 피워 난방도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정착촌 앞은 바다이고 정착촌 남문으로 나가면 엘 강(River Eel)이 흐르니 어족이 풍부했을 것이다. 호보목의 집은 순례자들이 필요로 하는 농어업 기술 습득과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내부의 분위기는 안온하고 따뜻했다.

 

호보목의 조리장은 집 밖에 별도로 만든 일종의 가건물 비슷한 아주 허름한 곳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나무 막대를 걸치고 그 밑에 불을 때서 음식을 만들었다. 오늘날로 치면 야영에서 조리하는 방식과 같았다. 그러나 왐파노억(Wampanoag) 부족은 이곳에 10,00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들이니 이것이 전통적 방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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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버목(Hobbamock)의 집 조리장소  © 김정권

 

호보목의 집을 나와서 그 북편에 있는 정착촌 공예센터(craft center)로 갔다 여기서는 당시 원주민들과 순례자들이 사용하던 물건들 의류, 직조, 머리장식(headdress) 등등을 만드는 곳이다. 옛것을 재현 한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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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착촌 공예센터(craft center)의 한 방  © 김정권

 

공예센터를 나와서 순례자들의 거주 지역으로 갔다. 캠퍼스는 대체로 마름모형이고 그 중간에 동서로, 또 남북으로 길이 열려서 십자형의 길이 전개되고 길 주변에 순례자의 집들이 세워져 있었다. 동서가 더 길고 남북은 좁은 편이다. 캠퍼스에 북문과 남문이 있고 서쪽이 높고 동쪽 바다 쪽으로 점점 낮아 져서 대서양이 아름답게 시야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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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imoth Plantation 순례자들의 거주 지역  © 김정권

 

서쪽, 요새 옆의 서문으로 들어가니 17세기 복장을 한 영국 노인이 우리에게 정착촌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사진도 촬영하고 설명도 듣고 난 다음에 요새(fort) 아래층부터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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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imoth Plantation 안내자 17세기 복장을 한 노인  © 김정권

 

서쪽 제일 높은 곳에 요새(要塞)가 있어서 마을 전체를 방어하였고 때로는 여기는 회의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아래층은 주로 회의나 모임에 사용하고 2층은 대포진지로 사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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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imoth Plantation Fort and Meeting Room  © 김정권

 

요새 2층에는 대포들이 4방으로 포진해 있었다. 적의 침입을 받으면 포를 발사했던 것 같다. 여러 문의 포가 있었다. 그러나 건물은 목조였고 상대방이 화포를 가졌다면 오래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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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imoth Plantation Fort 요새내부의 대포들  © 김정권

 

당시 왐파노억(Wampanoag) 부족 외에 다른 부족들은 침입해온 일이 있었고 주민은 모두 장년이라면 싸워야했다. 민병대라 할까! 그래서 항상 훈련이 되어있고 일이생기면 전투에 참가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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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들의 집     © 김정권

 

순례자들의 집은 초라했다. 4, 5평되는 좁은 공간에 7, 8명의 식구가 기거했으니 얼마나 열악했는가! 침대는 하나뿐인데 갓난아이와 아이 엄마만 침대에서 잠을 자고 나머지 식구들은 바닥에 매트리스(mattress) 같은 것을 펴고 잠을 자고 아침에는 일어나서 접어서 별도로 보관하는 형편이었으니 그들이 겪은 고난은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먹을 것이 부족했다. 도착한 겨울에 많은 희생자가 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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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들의 집 내부     © 김정권

 

이 좁은 공간에서 음식 조리도해야 했다. 한간짜리 집 한 구석에 불을 때고 거기서 조리를 했다. 오늘의 우리의 주거공간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집 뒤나 옆 부분은 텃밭으로 먹거리를 심고 가축도 길렀다.

 

에필로그

 

 17세기 순례자들의 조상, 이들 청교도는 왜 이런 고생을 하였는가? 대서양을 건너는 목숨을 건 항해와 플리머스 정착촌에서 악 조건과 싸워야하는 고난의 길을 무슨 힘으로 이겨냈을까? 그들에게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신념도 있었다. 자신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고난을 겪을수록 자신들의 삶은 더 빛난다는 확신이 있었다. 권위주의적이고 교권주의에 젖어있는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나야만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그 누구도 추종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을 고난 중에도 이기게 하는 힘이었다. 이 위에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다.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떠난 사람 중 청교도는 41명 뿐 이었다. 그들이 항해하는 동안 102명이 하나의 청교도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윌리엄 브래드퍼드의 지도력이다. 그래서 미국 플리머스 캐이프코드 만 프로빈스타운 항에서 하선하기 전에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복음의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믿음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며 원리일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우리의 삶의 근간이라면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선민이고 선민은 완전한 갱신(벧후5:17)과 완전한 순종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정신이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일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무엇을 회개하고 옷깃을 여미고 주님 앞에 다시 서야하는지를 미국 순례자들의 조상을 본으로 삼아 되돌아보기를 기원한다.

 

미국도 점차 청교도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미국이 정치적 건전성과, 사회기강의 확립, 경제 정의의 실현, 가족의 회복과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적어도 1960년대 이전의 정신을 되 찾아야할 것이다.

 

*김정권 시인(대구 침산제일교회 원로장로)는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명예교수로 있으며 대한민국 황조근조 훈장을 수훈했다. 장애인 인권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특수교육 관련 다수의 저작물과 『평신도 눈높이의 성경통독 가이드: 맛있는 1189, 행복한 298』(2016), 통독성경: 맛있는 1189, 행복한 298(2010-2018) CD(약 11,500페이지), 시집 『길을 모르는 사람의 길』(2016)

 

김정권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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